청춘, 그 어느날

‘보안부대에 숨어든 적색분자(?)’

재수 끝에 1977년, 동국대학교에 입학했고 클래식 음악에 빠져 들었다. 당시 서울 몇 곳에 산재해 있던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는데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유신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무렵이었다. 학생들이 군복 같은 교련복을 입고 여의도 광장에서 열병 분열식을 가졌고 집총을 하고 거리행진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체제와 대통령에 대한 한마디의 비판은 즉각 형무소행이었다. 음악감상실에 모인 청년들 가운데 이런 겨울공화국을 혐오하고 벗어나려던 이른바 의식화 돼있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이들에 이끌려 김지하의 시를 접했고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볼 수 있었다.

왠지 숙연해지고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가서는 그 곳 친구들과의 경험과 있었던 일을 큰 비밀이나 되는 양 주변 친구들에게 전하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1978년 6월,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8월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군에 입대했고 공교롭게도 보안부대에 배치됐다. 10월 초순 어느 날 친구들이 면회를 왔다. 지금 생각하면 녀석들 뭐 하러 왔는지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아무튼 녀석들은 학내 시위를 결행하기 전 나를 찾았고 그 때문에 나는 엄청난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네가 배후조종자지?” “이 녀석 보안부대에까지 숨어들은 적색분자 아니야?”

당시 내가 보안사령부가 있었던 경복궁까지 불려가 딱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면서 들었던 얘기들이다.

그때 본부의 호출로 전곡에서 경복궁으로 가면서 나는 얼마나 떨어야 했던지…학내시위가 불발로 돌아가고 친구들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다음 날로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수한 구타 속에서도 모르는 일로 시침을 뗐고 며칠 뒤 풀려나기는 했다.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어렵지만 큰 탈 없이 군 생활을 끝냈지만 복학 하기는 싫었다. 몇 일 배회를 하다가 당시 많은 학생 운동가들이 걸었던 현장의 길로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칸방에서 칼잠 자던 대우자동차 용접공 시절

광주민주화항쟁은 노동자·농민 등 민중이 중심이 되지 않은 학생들만의 시위로는 결코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운동은 학교에서 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이 사는 공장이나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체의 기득권을 버리고 직접 노동자·농민이 되어 그들 속에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노동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로 살기 위해서는 우선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며 노동자의 몸을 만들면서 대규모 공장 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친구와 함께 탔던 울산행 기차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울산 현대중공업 직업훈련소 연수생 20명 정도를 뽑는데 400여명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 그 모습. 당연히 우린 미역국이었고 이런 시도는 계속 이어져 마침내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가 82년 초였다.

당시의 노동운동은 생존을 위한 운동이었다. 나 스스로도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으며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고시 공부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부평 달동네의 방 한 칸에 8명이 모여 칼잠을 자면서 용접공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시험 때면 공구를 깨끗이 닦아 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던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7월 직업훈련원에 입소해 6개월간의 교육기간을 마친 후 83년 3월 대우자동차 차체부에 용접공으로 정식 입사했다.

나는 84년 8월, 부평공장에서 일하던 서울대 출신 송경평의 신분이 노출된 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군필자들의 호봉 승급과 상여금 문제로 시작된 싸움은 어용노조 밑에서 체념에 빠져있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활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열기를 바탕으로 84년 12월 18일 실시된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차체부 대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동원해 임금인상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자료를 제시했다. 우리가 제시한 임금인상안은 최저생계비 부족분과 생계비 상승률 보상, 생산성 향상분에 대한 공정 분배를 합해 최종적으로 27%였다.

 

김우중회장과의 노사대표 협상

회사와의 임금교섭에 들어갔으나 회사는 임금교섭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노조 집행부는 회사와 열성 노조원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4월 15일 1,000여명의 노조원들이 파업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자 노조위원장도 결국 파업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4월 16일 오전 8시를 가해 대우자동차는 전면 파업에 돌입하게 됐다. 파업이 계속되던 1985년 4월 21일 새벽 1시쯤 급한 전갈이 왔다. 사장실에서 누가 꼭 좀 보자고 한다면서 신변의 안전은 절대 보장 할 테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사장실에 간 나는 난데없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사장 이하 전 임원이 모두 기립 도열해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사람은 김우중 회장이었다. 국내 유수의 재벌 회장이 일개 노동자를 한밤중에 불러내 직접 보자고 한 것이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공식적으로는 4월 16일 노조집행부에 의해 결행됐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노조집행부가 아닌 나를 불러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노조가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와의 협상은 하나마나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나 김우중 회장이나 노사협상의 법률적 대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대우자동차 노사 양쪽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김 회장은 자신의 회사가 대규모 노사분규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돼 불량사업장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것을 못견뎌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 투입을 요청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 회장은 경총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5.2%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우중 회장과 나는 몇 차례에 걸친 승강이 끝에 기본급 인상 8%에 수당 등을 더해 총 16.4%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기본급 인상 18.7%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내용상으로는 요구조건을 상당부분 관철한 것이었다. 이로써 대우자동차 파업은 해결됐다.

합의안에는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도 있었으나 이는 김우중이 책임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김 회장은 정부의 강경 분위기를 읽고 나를 자기 차 트렁크에 싣고 경찰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김 회장으로서는 나름대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임금교섭은 일단 그렇게 일단락 지어졌지만 나는 수배자가 되어 있었다.

나를 포함해 총 8명이 구속된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7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주류는 여성이었고, 주로 섬유산업 등 경공업 분야에서 전개됐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의 주역은 건장한 남성이었고, 사업장 또한 대규모의 중공업분야였다. 이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개될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상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복이 굴러 화가되고, 화가굴러 다시 복이 되고… ”

파란만장했던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를 보내고 95년 1월, 우연한 계기에 내 인생의 항로가 수정된다. 대우자동차에 사무직으로 복직이 됐던 것이다.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유화국면에서 전노협 활동이 궤도에 올랐고 대우자동차 노조도 활발한 복직투쟁을 전개했는데, 그 성과의 하나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시베리아 설원의 흰 눈이 내 상념의 지평을 넓게 했고 런던지사에서 나는 열심히 일을 했다. 당초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회사측에서 배려하겠다고 해서 랭귀지 코스를 등록은 했었지만 팽팽 돌아가는 업무 때문에 제대로 출석을 할 수 없었고 나의 영어는 그야말로 현장에서 부딪히며 몸으로 배운 바디 랭귀지가 됐다.

김우중회장은 영국시장에서의 대우차 마켓쉐어 1%라는 사실 그때 상황으로 보면 무모한 목표를 제시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초과달성했다. 나는 작은 누비라를 타고 동료들과 함께 영국 전역을 누비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협상의 기술이며 경영의 원리를 배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저돌성이 화근이 되어 대우사태를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며 세상사며 너무 밀어 붙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튼 6년간의 영국 생활은 나를 엄청나게 키웠다.

대우사태에 따라 구조조정으로 나 역시 영국에서 귀국해서는 이내 퇴사를 해야 했다.

2002년 2월 퇴사를 했는데 알다시피 그때부터 대선국면이었다. 드라마와 같았던 2002년 대선에서 나는 동지들과 함께 개혁당을 만들어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노무현 후보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 뒤 나는 열린우리당 창당에 한몫을 했고 고향과도 같았던 부평에서 2004년 총선을 준비했지만 아직은 역량이 부족했고 시간이 필요했던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복이 된다고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으로서 그동안 갈고 닦았던 교류와 소통의 미학을 펼치면서 나를 또 한번 돌아보게 했고 또 적지 않이 나를 키웠다.